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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봉황동유적지

여행 느낌/경상도

by 짱신사 2016. 5. 2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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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2호이다. 철기시대 초기의 것으로, 높이가 7m, 동서의 길이 약 130m, 남북의 너비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이루어져 있다.

 구릉의 남쪽에는 회현동의 마을이 인접해 있고, 북동쪽 낭떠러지 밑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어 패각층이 드러난 단면과 구릉 위에 흩어진

 흰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다.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이지만, 1920년에 있었던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비롯하여 그 뒤 몇 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에 대한 문화적 성격과 연대의 개요가 밝혀져서, 한국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이다.

 일련의 발굴을 통하여, 이른바 김해토기()라고 명명()된 토기의 조각들이 가장 많고, 도끼와 손칼과 같은 철기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철기가 이미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철기 이외에 골각제품()으로서도 골촉() ·골침() 등과

 송곳 같은 찌르개류[]가 함께 출토되었다. 김해토기는 종래의 민무늬토기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서 만든 발달된 경질()의 토기로서,

 그 특색은 문살무늬나 삿무늬 등의 타형()무늬가 있다는 점이다. 타형무늬는 토기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무늬가 새겨진 방망이로 두드려서

 생긴 것이다. 특히 후일에 와서 신라토기()의 모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원시신라토기라고도 한다.

 1920년의 발굴 때 왕망()의 신()나라 때의 돈인 화천() 1 개가 나와 이 패총의 상한연대()가 밝혀졌고, 또 함께 발견된

 탄화미()는 한국의 벼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뒤 34 ·35년의 발굴을 통하여 한 무리의 돌널무덤과 그 옆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개의 옹관에서 세형동검()과 청동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남방식 고인돌[]의

 뚜껑돌로 보이는 한 개의 큰 돌이 현재에도 있다. 이 유적들 사이의 층위적 관계()는 아직도 연구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2001년 2월 5일 금관가야의 집단 취락지인 봉황대(경남문화재자료 제87호)와 합쳐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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